이태주 서울대 인류학 박사, 하버드대·서섹스대· 마스트리히트대 방문연구원 사진 김소희 기자
이태주
서울대 인류학 박사, 하버드대·서섹스대· 마스트리히트대 방문연구원 / 사진 김소희 기자

“한국은 공적개발원조(ODA) 분야에서 30년의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ODA 전략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어서 성과가 눈에 띄지 않아요.”

이태주 한성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11월 19일 ‘이코노미조선’과 인터뷰에서 한국 ODA 현황을 이렇게 진단했다. 그의 경력을 설명하려면 88서울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교수는 국내 최초 해외 봉사단에서 지도 교수를 담당했다. 청와대 내부에서 ‘한국도 선진국 반열에 올랐으니 마땅한 책무를 다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1989년 만든 봉사단이었다.

1991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신설되면서 해외 봉사단도 이곳에 편입됐다. 일본의 ODA 전담 기구인 일본국제협력기구(JICA)의 법령과 규정을 일일이 번역해서 직제를 따라 만들던 KOICA의 태동기였다. 그렇게 10년 넘게 KOICA의 창단 멤버로 일하다가 2002년 학계로 복귀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나무가 아닌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의 ODA 전략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려웠고 수백 개의 자잘한 사업은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이 돈이 다 국민 세금인데…’, 당시엔 해외 현장에서 개발 협력 자금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쓰이는 경우도 많았다. 고민 끝에 2006년 ODA 시민 감시단 ‘ODA 와치’를 만들었고 현실적 대안을 연구하고자 2011년 싱크탱크 ‘글로벌발전연구원’을 창립했다.

국내 ODA 역사와 궤를 함께한 그를 만나러 그의 한성대 연구실을 찾았다. 3층 연구실 문을 삐걱 열자마자 서재 앞에 놓인 수십 개에 이르는 아프리카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인류학자로서 발 디딘 국가만 120개국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 ODA의 방향성을 그에게 물었다.


한국에 ODA 전략이 없다는 이야기가 수년째 나오고 있다. 매년 관계 부처가 모여 종합시행계획을 발표하지 않나.
“현행 체계는 각 부처가 개별적으로 사업 계획을 올린 내용을 ‘짜깁기’하고 중복된 내용을 덜어낸 것에 불과하다. 지원 대상국의 사정에 맞춰 우선순위를 세울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전략을 세우는 방법은.
“부처 간 지속적 논의와 더불어 현장이 중요하다. 현장에서 고위급 관료와 지속해서 대화하면서 요구를 파악해야 한다.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연설할 때마다 ‘한국과 같은 정보기술(IT) 강국이 되겠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으로서 좋은 기회인데 ‘톱 리더’가 원하는 수준의 맞춤형 원조는 부족하다.”

한계의 원인은 무엇인가.
“고위급 관료에게 정책 자문가 역할을 수행할 만한 지역 전문가가 부족하다. ODA의 본질은 물자나 장비 조달이 아닌 컨설팅과 지식 전수다. 그러려면 인류학, 정치경제학, 지리학과 같이 지역 이해도를 높이는 기초학문 근간이 필요하고 5~10년간 현지 경험으로 무장한 인재를 키우는 시스템도 만들어야 한다. KOICA 인력의 3분의 2는 지역별 전문가로 구성하고, 나머지를 분야별 전문가로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ODA 강국으로 평가받곤 한다.
“흔히 일본 ODA의 위력으로 자금력을 언급하는데, 정말 무서운 점은 ‘노련함’이다. JICA 현장 사무소에 나가보면 머리 희끗희끗한 노년의 지역 전문가가 포진해 있다. 개발도상국의 고위급 관료는 군부 정권 소속으로 장기 집권한 사람이 많다. 그들과 친분을 쌓고, 사업 계획과 같은 고급 물밑 정보를 얻고, 조언을 건네기 위해선 그 정도로 능숙한 사람이 필요하다. 반면 한국의 경우 의욕은 넘치지만 경험이 부족한 30대 직원이 현장에 나가 있다.”

왜 우리나라는 30대가 주로 나가나.
“한국에도 부처별로 시니어 전문가 파견 프로그램이 있지만 조직 구조상 해외 체류 기간이 길지 않다. 현실적으로 은퇴 연령대가 장기 파견이 가능하다고 본다. 50대에만 나가도 70대까지 20년 이상 활동할 수 있다. 젊은 인재가 업계를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들이 40~50대가 되면 지역 전문성을 쌓은 인재가 될 테니 말이다.”

연륜이 중요하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비슷한 맥락으로 개도국에선 월드뱅크 직원보다 한국의 전직 기재부 장·차관을 만나는 것이 훨씬 도움 된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경제 개발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KSP(Knowledge Sharing Program) 모델이 잘 운영되고 있다. 다만 완결성을 높이려면 컨설팅이 사업으로 연계돼야 한다. 시범 사업을 해주면 실제 프로젝트까지 이어질 수 있다. 사업 자금도 빌려줄 수 있고. 우리나라는 돈도, 인력도, 노하우도 있는데 통합 능력이 부족하니 안타깝다.”

한국형 ODA는 어떻게 만드나. 그간 자원 외교, 코리아에이드와 같은 시도가 있었다.
“그건 일회성 이벤트에 불과했다. ‘한국형’ 원조를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브랜드 이미지는 필요하다. ODA도 크게 보면 비즈니스다. 글로벌 경쟁이 심해서 퀄리티가 좋아야 한다. 한 나라에 임팩트 있는 사업을 해주면 입소문을 타고 다른 나라에서도 원한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세련된 포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개발 원조, 평화, 인권과 같은 담론을 주도하면서 보이지 않게 실속을 챙겨야 한다. 자원 외교처럼 목적성이 뻔히 보이는 원조는 거부감을 사기 마련이다.”

어떤 콘텐츠가 가능할까.
“지속 가능성이 있으면서 한국만이 잘하는 차별성을 찾아야 한다. 한국이 유엔(UN)에서 수년간 전자정부 지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데, 개도국은 행정 시스템을 전산화하지 않은 곳이 많다. 전자정부 시스템을 구축하면 효율성과 투명성이 높아지면서 정부 부패도 줄어든다. 정보 접근성의 민주화도 노릴 수 있다. 두 번째로 장학금 사업이다. 호주의 경우 우리나라와 원조 규모가 비슷한데 프로젝트 사업 대신 90%를 장학금 사업에 쏟는다. 개도국의 고위급 자녀를 호주 대학으로 데려온다. 그들이 10~20년 지나면 장·차관급 친호주 인사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동남아 정책 리더를 한국에서 키워야 한다. 모든 일은 ‘사람’이 결정한다. 국제 사회도 인맥으로 돌아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원 대상국을 어떻게 결정해야 하나.
“우리의 콘텐츠를 전파할 수 있고 전략적 협력 가능성이 큰 국가를 찾아서 선정해야 한다. 중점 국가별로 경제 사회 발전 단계에 따라 맞춤형 전략이 필요하다. 장기적 관점에서 해당 국가의 5~10년을 내다보고 개발 계획을 수립하자. 또 중점 지원국을 밀실에서 정하지 말고 공개적으로 논의했으면 좋겠다. 관성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국가는 재고해봐야 한다. 투자가 몰리는 베트남은 ODA를 줄일 필요가 있다. 석유 자원이 풍부한 아제르바이잔과 해외 자본이 이미 많이 유치된 페루 등에 굳이 계속해서 원조하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다.”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이 나아가야 할 대외협력 방향은.
“우리나라는 대외협력 없이 한 달도 살 수 없는, 대외 의존도가 매우 높은 나라다. 양자 외교에 집중하는 외교부와 별도로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대외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는 국제 협력 부처가 필요하다고 본다. 보편적 가치와 ODA, UN과 다자 협력, 지역 협력, 기후 위기와 환경 에너지 협력, 글로벌 어젠다, 재외 교포와 국제 이민 정책, 문화협력 등을 다루는 곳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국가 미래 비전을 수립하고 핵심적 수단으로 ODA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한 국가의 ‘매력 지수’를 의미하는 ‘소프트파워’ 평가에서 늘 1위를 차지하는 프랑스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국가 이념과 비전을 세우고 홍보해 나간 것이다. 한국만의 소프트파워를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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