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 카로 영화 ‘기억과 욕망(1997)’ ‘웨일 라이더(2002)’ 각본·감독, ‘노스 컨츄리(2005)’‘맥팔랜드 USA(2015)’‘주키퍼스 와이프(2017)’ ‘뮬란(2020)’ 감독 /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니키 카로
영화 ‘기억과 욕망(1997)’ ‘웨일 라이더(2002)’ 각본·감독, ‘노스 컨츄리(2005)’‘맥팔랜드 USA(2015)’‘주키퍼스 와이프(2017)’ ‘뮬란(2020)’ 감독 / 사진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여성’과 ‘전통’이 반의어로 해석되는 시대다. 여권(女權)이 향상되면서 성차별적인 전통적 질서는 힘을 잃었다. 여성이 결혼해서 국가에 기여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인식은 사라지고 있다. 차라리 전통적 가치인 ‘충(忠)’과 ‘효(孝)’를 포기하고 자유를 추구하겠다는 선언이 익숙해졌다.

1998년 제작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은 여성과 전통의 조화를 꾀했다. 여성이 충과 효를 지켜내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 실존 인물인 화뮬란(花木蘭)은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북방 오랑캐와의 전쟁에 참전한다. 여성이 전통적 질서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 성공적인 혼인으로 통용되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남장한 뮬란은 끈기와 지략으로 여성의 힘을 증명하면서 사내들 사이에서 인정받는다. 본래 모습이 밝혀진 이후에도 중국 황제에게 장군직을 제안받는다.

20년이 지난 현재까지 여성과 전통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뮬란이 올해 류이페이(유역비) 주연의 실사판 영화로 다시 스크린에 등장한다. 뉴질랜드 태생의 여성 감독 니키 카로가 연출을 맡았다. 카로 감독이 글로벌 영화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첫 영화는 토론토 국제영화제 관객상 수상작 ‘웨일 라이더(2002년)’.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 족장 집안에서 유일한 장손으로 태어난 소녀 ‘파이’ 이야기다. 파이는 남성 족장만을 고집하는 할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첫 여성 족장이 되면서 대가 끊길 뻔한 전통을 지켜낸다. 나름의 방식으로 전통적 가치를 추구했던 뮬란과 비슷하다.

카로 감독은 이번 연출로 본인이 여 족장 파이, 더 나아가 여전사 뮬란으로 거듭났다. 장편 서사 영화(역사적 주제를 다루고 많은 액션을 담는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감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뮬란’의 제작 예산은 2억달러(약 2375억원). 역대 개봉작 가운데 여성 영화감독이 제작한 1억달러 이상 규모의 영화는 ‘K-19 위도우메이커(2002·캐서린 비글로 감독)’뿐이다. 카로 감독에게 ‘뮬란’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



‘뮬란’을 연출한 계기는.
“뮬란 캐릭터 그 자체에 마음이 끌렸다. 마을 소녀에서 남자 병사, 그리고 전사이자 영웅으로 변해가는 여정이 유의미하고 울림이 있었다. 마치 이 이야기가 몇 세기 전에 처음 쓰였을 때처럼 말이다.”

1998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을 실사판으로 제작했다. ‘뮬란’이 20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도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뮬란의 본성이 큰 의미가 있다. 그녀는 책임감 있는 딸이자 사랑스럽고 용감한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상처받기 쉽고 실수투성이다. 여성 캐릭터로서 뮬란은 (초능력을 지닌) 슈퍼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다. 남장(男裝)한 뮬란은 여정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능력 발휘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강인한 체력에 기대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영리함(her smarts), 그녀의 순발력(her quick-wittedness), 그녀의 강력한 의지(her strong will). 세 가지가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고 포악한 적을 물리치는 원동력이다.”

카로 감독이 그리고 싶은 강인한 여성상은 육체적 조건에 국한되지 않는다. 카로 감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를 그린 ‘주키퍼스 와이프(2017)’ 개봉 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영화 속 여성의 힘이 겉보기에 강인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마치 여성의 몸에 남성이 들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심각할 정도로 강인하지만 동시에 부드러운 캐릭터를 찾아 헤맸다.”

극 중 뮬란은 북방 오랑캐 유연족에 맞선다. 떼로 밀려드는 남성 군단과 거구의 족장 보리 칸도 뮬란의 지략을 당해내지 못한다. 뮬란의 부드러운 힘은 ‘상대의 강점을 역이용하는 지혜’에서 나온다. 적이 쏘는 화살을 발로 차서 다시금 그의 심장에 꽂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뮬란에게 오히려 유의미한 적수는 분신술로 적의 동향을 읽어내는 영리한 여성 빌런 시아니앙이다.

원작에는 없는 여성 빌런이 등장한다.
“아시아의 명배우 공리가 신비롭고 강인한 여성 캐릭터 시아니앙을 맡았다. 보리 칸의 편에서 싸우는 역할이다. 보리 칸은 이전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고 중국에 복수를 꾀하는, 매우 극악한 남성이다. 복수를 위해 그는 시아니앙에 의지한다. 시아니앙은 상상을 뛰어넘는 기(氣)를 지니고 있다. 그녀가 없었다면 보리 칸도 목표 달성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시아니앙 역을 새롭게 만든 이유가 궁금하다.
“우리의 히어로에 알맞은 적수가 필요했다. 시아니앙은 뮬란만큼 강인한 여성 캐릭터로, 그녀가 겪어온 삶의 궤적은 뮬란의 그것과 평행선을 이룬다(시아니앙은 기가 세다는 이유로 ‘마녀’로 낙인찍히고 국가와 가족으로부터 추방당한 아픈 과거가 있다. 하지만 두 인물의 극복 방식은 다르다. 시아니앙은 유연족의 부하가 되어 여성이 인정받는 국가를 건립하는 ‘혁명’을 꿈꾸지만, 뮬란은 자국을 수호하면서 여성 능력을 증명하는 ‘개혁’을 이뤄낸다). 여러 방면에서 뮬란이 시아니앙보다 좀 더 진보한 강인한 여성상으로 그려진다.”



니키 카로 자신도 할리우드 ‘제2의 뮬란’

전장(戰場)에 나선 뮬란만큼이나, 카로 감독의 여정도 하나의 서사시다. 여성 감독의 블록버스터급 액션 영화 연출 데뷔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녀가 선택한 전우(戰友) 역시 대다수 여성. 촬영감독, 조감독(이자 현장감독)이 모두 여성이다. ‘주키퍼스 와이프’ 제작 당시에도 그녀는 여성 영화인을 대거 고용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카로 감독은 그녀에게 내재한 ‘여성성’이 액션 영화의 차별화 전략이라고 말한다. “무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명 깊고, 동시에 아름답다. 무언가를 아름다워지도록 만들고 싶은 욕구는 아마 내 여성성에서 기인할 거다.” 카로 감독은 유혈이 낭자할 법한 전투 장면을 짜임새 있는 무술 각축의 장으로 연출했다. 중국식 전통 옷과 화장, 노상에서 파는 향료를 화려한 색감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원거리에서 찍은 장관(壯觀)은 시각적 즐거움을 극대화한다.

연출하고 싶었던 방향이 있나.
“애니메이션을 복제하지 않되 뮬란 본래 감성을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애니메이션 ‘뮬란’을 사랑한다. 상징적인 요소를 실사판 ‘뮬란’에도 담아낸 이유다. 뮬란이 설산에 지진을 일으켜 눈사태를 만들고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애니메이션에도 등장하는 장면이다). 실사 촬영은 눈사태의 폭발적인 힘을 전달할 수 있다. 뮬란 팬의 입장에선 애니메이션이 실제 생명을 얻은 것과 같은 진정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실사판인 만큼 원작보다 전쟁 장면이 더욱 생생하게 담겼다.
“액션의 규모가 매우 크다. 폭발적일 정도다. 뮬란 이야기는 수천 명이 나오는 장대한 전쟁으로 거듭난다. 거대한 화폭에 영화를 담는 일, 우슈 스타일의 액션을 담는 일이 모두 스릴 넘쳤다. 액션 배우들은 쿵푸 전문가와 밀접하게 협업해 액션을 만들었다. 다른 액션 영화와 차별점은, 우리의 액션은 현실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뮬란은 초능력을 발휘하는 슈퍼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소녀로서 무술에 임한다. 그녀의 신체와 마음을 단련해서 가장 눈부신 일을 해낸다.”

여성 제작진을 대거 고용했다고 들었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다양성의 가치가 언제나 중요하다. 이 영화에서 대다수 팀의 헤드는 여성이 맡았다. 여성이 이 정도 규모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촬영 감독 맨디 워커와 협업은 단연코 내 커리어의 최고 경험 중 하나다. 그녀가 만드는 시각적 요소들은 너무나도 드물고 매우 특별하다. 장편 서사 영화를 그것의 본성에 맞춰 잘 전달한다. 직관적이고 사실적이다. 그러면서도 생생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액션 영화에선 발견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그녀는 전달할 줄 안다.”

후배 영화 제작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젊은 제작자들, 특히나 젊은 여성 제작자들에게 조언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당신의 진실한 목소리를 이용하라는 것이다. 강인하면서(strong) 진실하고(true), 오늘날 젊은 제작자의 경험을 반영하는 새로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나를 매우 매우 설레게 하는 목소리다.”

“대형 영화에 여성인 내가 첫발을 들인다면, 신이 도와 그 문이 열린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도록 그 문을 부숴버리겠다.” 그녀의 바람이 영화 ‘뮬란’으로 점차 현실화할지 지켜보자. ‘뮬란’은 9월 17일 국내 극장 개봉 예정이다.

 

김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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