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한국 산업화의 주역인 동시에 한국 경제 성장의 한계를 드러냈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한국 산업화의 주역인 동시에 한국 경제 성장의 한계를 드러냈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12월 9일 오후 11시 5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3세. 그는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나 10대 때 6·25 전쟁을 겪었다. 1970년대에는 한국 경제의 압축성장 시기와 맞물려 대우그룹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역대 최대 규모의 부도를 내고 해외 도피 생활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창업자금 500만원으로 재계 순위 2위(1998년 기준) 기업을 만들어낸 ‘샐러리맨의 신화’였고, 전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펼친 ‘세계 경영’의 선구자였다. 반면 분식회계와 경영비리를 이유로 1년 6개월 동안 복역하며 부도덕한 경영인이라는 낙인도 찍혔다. 한국 산업화의 주역인 동시에 한국 경제 성장의 한계를 드러낸 김 전 회장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했다.

김 전 회장은 1936년 12월 19일 대구에서 김용하씨와 전인항씨 사이의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주도 출신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쿄 법정대학 유학 후 서울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인재였다. 김씨는 대구사범학교 교사를 거쳐 해방 후인 1949년에 제주도지사를 지냈다.

김 전 회장은 비교적 유복하고 안정적인 가정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6·25 전쟁 때 삶의 궤도가 달라졌다. 아버지가 납북되고 형이 군에 입대하면서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김 전 회장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14세 때 신문 배달을 하며 어머니와 두 동생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는 자서전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웬만한 어려움이나 고난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을 배짱을 배웠다”고 말했다.


31세에 500만원으로 창업 후 재계 2위에

연세대를 졸업한 그는 1960년부터 1966년까지 친척이 운영하던 무역회사(한성실업)에서 은행 관련 업무와 무역을 배웠다. 이곳에서 섬유제품 수출을 성사시키며 자신감을 얻은 것을 계기로 1967년, 대우그룹의 모태인 대우실업을 세웠다. 그의 나이 31세 때로 자본금 500만원에 직원 5명이 전부였던 회사다. 대우실업의 ‘대우(大宇)’는 동업자였던 도재환씨가 운영하던 트리코트 원단생산 업체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들었다.

창업 5년 만에 수출 100만달러를 달성하는 등 성공을 맛본 김 전 회장은 건설·중공업·조선·자동차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한다. 1973년 건설사 영진토건을 인수한 것이 계기였다. 영진토건은 대우개발로 이름을 바꿨고, 1982년 대우실업과 영진토건을 합쳐 (주)대우가 탄생했다. 1978년에는 대한조선공사의 옥포조선소를 인수해 대우조선공업을 출범시켰고, 1979년에는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다. 1974년 전자제품 무역업을 위해 세웠던 대우전자는 1983년에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인수하면서 삼성전자, 금성(현 LG)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내 3대 가전 회사로 성장했다.

특히 대우그룹은 1980~90년대에 급성장했다. 1982년 대우그룹 회장이 된 김 전 회장은 1980년대 후반 구소련의 붕괴를 새로운 기회로 삼았다. 몰락한 동유럽 현지에 자동차 공장을 건설하거나 인수한 것이 대표적. 김 전 회장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출간된 것도 이즈음(1989년)이다.

대우그룹은 대우실업에서 출발한 지 31년 만인 1998년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 법인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했다. 해외 고용인력은 1993년 2만2000명에서 1998년 15만2000명으로 늘었다. 1998년 당시 자산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에 이르렀다. 당시 대우그룹은 현대에 이어 국내 재계 2위였다.


IMF 직격탄…해외 도피에 복역

한국 경제를 위기에 빠트린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는 김 전 회장과 대우그룹을 강타했다. ‘사업은 빌린 돈으로 하고 벌어서 갚으면 된다’ ‘기술이 없으면 사 오면 된다’ 등 공격적인 사업 스타일의 바탕이었던 ‘차입 경영’이 역풍을 맞은 것. 1998년 대우차와 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면서 그룹 전체가 급격하게 흔들렸고 금융 당국의 기업 어음 발행 한도 제한 조치, 회사채 발행 제한 조치가 더해져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대우그룹은 부채비율이 400%를 넘기자 1998년 8월, 결국 당시 남아있던 25개 회사 중 12개 회사에 대한 워크아웃(기업회생)을 신청했다. 1998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구조조정 방안도 내놓았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결국 대우그룹은 40조원이 넘는 분식회계를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중 분해됐고, 김 전 회장은 검찰 수사를 피하고자 1999년 10월, 중국 옌타이에서 열린 자동차 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뒤 종적을 감췄다. 그는 5년 8개월 동안 영국·베트남 등을 떠돌며 해외 도피 생활을 했다. 한국 대표 경영인으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었던 인물이 비운의 주인공으로 전락한 때였다. 김 전 회장은 2005년 6월 입국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는 분식회계 및 사기 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 도피 등의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 6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사면됐다.


말년엔 글로벌 청년 사업가 양성

김 전 회장은 사면 이후 청년 양성에 힘썼다.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 육성 사업을 시작했다. 대우세계 경영연구회가 운영하는 GYBM은 한국 대학 졸업생 중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 취업 또는 창업하려는 이들을 현지에서 무료로 교육하는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1000여 명이 GYBM 과정을 밟아 베트남·인도네시아·미얀마·태국 등 동남아 4개 국에 진출했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창립 50주년이던 2017년,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개정판을 펴냈다. 그는 책 서문에서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더 많은 젊은이가 세계를 누비며 우리 세대보다 더 큰 꿈을 이루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김 전 회장은 생의 막바지에 청년들의 글로벌 진출을 지원하며 한평생 강조했던 ‘세계 경영’에 대한 열망을 꺾지 않았다.

정미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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