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던 순간부터 도장과의 긴 악연은 시작됐다. 대학원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이 있었다. 입학 오리엔테이션에서 받아든 안내문에는 ‘은행 계좌를 만들어야 하니 도장이 필요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도장 업자가 조만간 학교를 방문해 단체 주문을 받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한국과 중국 등 한자권에서 온 학생들은 고민이 덜했다. 미국에서 온 학생도 5자 이내의 가타가나로 성을 변환해 무사히 신청을 마쳤다. 태국인 유학생은 고심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의 긴 이름을 지름 18㎜의 도장에는 도저히 욱여넣을 수가 없었다.

당시 준비한 도장은 수년간 수백 장의 종이를 찍어 내렸다. 부동산 계약, 자동차 등록, 등기우편 수령, 증명서 신청, 입사 서류 작성은 물론이고 택배를 받을 때, 보험에 가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시락 정기배달을 신청하자 배달원이 용지 더미를 들고 찾아와 도장 날인을 요구했다. 인주가 덜 묻어 조금 흐릿하게 찍히자 배달원은 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표정을 짓고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도 날인의 퀄리티에 타협할 수 없다는 원칙을 관철했다.

도장이란 무엇인가. 기원전 5000년쯤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출현했다고 한다. 높은 신분의 상징이자 권위를 나타내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왕의 이름으로 이를 허하노라’라며 둔탁하게 내려찍는 통치의 도구였다. 일본에서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물건을 받을 때도 ‘내가 이를 수취하였음을 증명하노라’와 같은 날인의 의식을 반복하는 일상을 보낸다. 이 권위의 상징은 신발장 위를 굴러다닌다.

도장은 때때로 위기를 초래했다. 휴가를 내 관공서를 찾았는데 ‘이 도장은 사용할 수 없다’고 퇴짜를 맞았다. 소위 일본에서 미토메인(認印)이라고 부르는, 일상생활에 쓰는 막도장을 공식적인 인감(印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근처 도장 가게를 찾아 급행료를 내고 새 도장을 파야 했던 경험도 있다.

결과적으로 총 4개의 도장을 갖게 됐다. 새 집이나 자동차를 사는 정도가 아니고서는 쓸 일이 없을 듯한 인감, 인감을 도난당하면 은행 계좌가 털릴 수도 있다는 조언에 새로 판 은행인(銀行印), 그 외의 일상생활에 쓰는 미토메인과 택배를 받을 때 쓰는 샤치하타(자동으로 잉크가 묻어나오는 간이 도장)까지.


일본은 부동산 계약, 자동차 등록, 등기우편 수령, 증명서 신청, 입사 서류 작성뿐 아니라 택배를 받을 때, 보험에 가입할 때 등 많은 절차에 도장이 필요하다. 사진 블룸버그
일본은 부동산 계약, 자동차 등록, 등기우편 수령, 증명서 신청, 입사 서류 작성뿐 아니라 택배를 받을 때, 보험에 가입할 때 등 많은 절차에 도장이 필요하다. 사진 블룸버그
일본 욕실 전문 업체 토토는 음악을 틀어주고 자동으로 물을 내려주며 체지방 측정, 소변 검사 등을 제공하는 스마트 변기를 판매하고 있다.
일본 욕실 전문 업체 토토는 음악을 틀어주고 자동으로 물을 내려주며 체지방 측정, 소변 검사 등을 제공하는 스마트 변기를 판매하고 있다.

도장으로 인한 피로가 쌓이면서 누구에게 이 울분을 터뜨려야 할지 늘 궁금했다. 낡은 법과 관습 탓인가. 변화를 꺼리는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때문인가. 아니면 도장 업계의 장삿속인가. 그러다 이유를 알았다. 2019년 일본 내각이 임명한 다케모토 나오카즈(竹本直一) 과학통신기술정책 담당대신(한국의 장관에 해당)이 ‘일본의 인감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 회장을 맡고 있어 부적격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정보기술(IT) 혁신을 이끌어야 할 자리에 도장 사용을 고집하는 고령자를 앉혔다”는 비판과 함께 도장 업계와 정계의 유착에 시선이 쏠렸다.

다케모토 대신은 “인감을 찍는 전통과 IT가 양립할 수 있다”면서 “인감을 스캔해 디지털화하면 될 것”이라고 비판에 응수했다. 비웃음에 그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일본의 내로라하는 대기업인 히타치와 덴소가 합작, 인공지능으로 서류의 도장 직인란을 파악해 자동으로 잉크를 묻혀 정확한 위치에 도장을 찍어주는 로봇 ‘코봇타(COBOTTA)’를 내놓았다.

지난해 12월 시제품이 공개된 이 로봇은 2020년 3월부터 렌털요금제로 일본의 기업 현장에 투입될 예정이다. 도장을 없애지 않아도 빠른 일 처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도장 업계 종사자와 업무 효율화를 위해 고심하던 일선의 노동자 모두 구원투수를 찾게 될 것이다. 다만 다른 수많은 선진국은 더 좋은 해결책을 알고 있다.

일본의 아날로그적인 일상은 도장뿐만이 아니다. 최근 호적등본을 떼러 한국의 동사무소 격인 구약소(区役所)를 찾았다. 신청서류를 수기로 작성해 정성스레 도장을 찍고 내밀었더니, 일본인 아내의 호적이 지방이어서 해당 지역의 구약소에 신청해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신청은 직접 방문이나 우편으로만 가능했다.

우편으로 신청할 때는 수수료를 동봉해야 하는데, 우체국에서 구입한 현금 서류 전용 봉투에 현금을 넣거나 소액 우편환을 사서 보내야 했다. 우편환 한 장에 100엔의 수수료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반송용을 포함한 10엔짜리 봉투와 84엔짜리 우표가 각각 2장, 1통 450엔인 호적등본 2부에 대한 수수료 900엔과 우편환 수수료 100엔씩 2건. 구약소와 우체국을 오가는 교통비와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1288엔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무료로 인터넷 발급이 가능한 서류다.

가장 납득이 되지 않는 건 우편환 발급 수수료 100엔이었다. 450엔짜리 두 장을 보내는데 200엔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게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2007년 일본우정그룹이 민영화하면서 기존 10엔이었던 수수료가 100엔으로 올랐다고 한다. 민영화했다고 하지만 일본우정그룹 사장직은 여전히 전직 고위 관료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자리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일본우정그룹의 서비스는 민간기업의 수준을 한참 밑돌고, 과거 정부 허가 사업의 독점적인 행사로 수익을 올린다.

일본의 아날로그한 일상에 사용되는 도장과 은행, 우체국 수수료는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기술의 발전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한편으로 ‘하이테크’ 일본은 기술 과잉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물건을 내놓기도 한다. 음악이 흐르고 자동으로 물을 내려주는 데다가 와이파이에 접속해 체지방까지 측정해 주는 최첨단 변기를 파는 전자 상가 한 편에는 여전히 도장 가게가 버티고 있다. 이것은 신구의 공존인가, 카오스인가.

이진석 ‘오타쿠 진화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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