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베리 에일사 코스 9번 홀. 1873년 만들어진 등대는 턴베리를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 중 한 곳으로 만들었다. 사진 민학수 조선일보 기자
턴베리 에일사 코스 9번 홀. 1873년 만들어진 등대는 턴베리를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 중 한 곳으로 만들었다. 사진 민학수 조선일보 기자

턴베리(Turnberry)의 하얀 등대가 보이는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매끈한 등대의 자태에 빨려 들어가듯 걸음을 재촉하는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오랫동안 꿈꾸며 언젠가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에 도달한 이들의 들뜬 표정에서 동지애마저 느껴진다. 턴베리 등대는 골퍼들의 영원한 노스탤지어(nostalgia·향수)다.

하얀 등대와 바다 건너 아스라이 보이는 에일사 크레이그 섬까지 절묘한 풍경을 빚어내는 턴베리 골프 코스는 미국의 페블비치와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프장의 하나로 꼽힌다. 스코틀랜드 최대 항구 도시인 글래스고에서 남쪽으로 80㎞, 스코틀랜드 남서부 에어셔 해안에 자리 잡은 링크스 코스다.

이곳엔 에일사 코스와 킹 로버트 더 브루스 챔피언십 코스 그리고 9홀 규모의 애런 등 총 45홀의 코스가 있다. 에일사 코스가 바로 ‘등대가 있는 턴베리’다.

등대는 골프 코스보다 앞선 1873년 만들어졌다. 스코틀랜드 등대 설계의 선구자 역할을 한 토머스 스티븐슨이 디자인했다. 그는 소설 ‘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드’ 등으로 유명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아버지다.

등대가 있는 곳은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왕인 로버트 더 브루스(1274~1329)가 태어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1306년 왕위에 올라 23년간 스코틀랜드를 다스린 그는 잉글랜드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벌인 전사이자 영웅이었다. 1314년 에드워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의 침공을 막아낸 배넉번 전투가 유명하다. 등대 앞 해안 절벽에는 폐허가 된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 브루스 왕이 태어난 ‘턴베리 성’으로 추정된다.

등대에는 아담하면서도 품격 있는 레스토랑이 있다. 맛 좋은 햄버거와 생선튀김, 커피, 맥주 등을 판매한다. 레스토랑 바깥 테라스 자리에서 끊임없이 포말을 일으키는 아일랜드해(海)를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한잔은 각별하다. 운 좋게 사발을 뒤집어 놓은 듯한 에일사 크레이그 섬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턴베리 직원은 “코스에서 섬까지 거리는 약 18㎞인데 오늘처럼 맑은 날씨여야 볼 수 있다”고 했다. 에일사 크레이그는 평창 동계 올림픽을 전후해 국내에도 많이 알려졌다. 컬링에 사용되는 둥글고 납작한 돌이 에일사 크레이그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다.

턴베리에서는 그동안 디 오픈(브리티시 오픈)이 4차례(1977·1986·1994·2009년) 열렸다. 코스는 1906년 만들어졌다. 원래 버려진 땅이었던 이곳에 골프 코스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제3대 에일사 후작인 아치발드 케네디였다. 그는 1899년 이곳을 지나는 해안철도가 건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코스를 만들기로 했다. 턴베리 기차 역은 1906년 만들어져 1942년까지 운영됐다.


1 턴베리 클럽하우스 내 프로숍에서 판매 중인 기념품. 그린보수기에 금장식을 했다. 등대 화장실 내부도 황금빛으로 치장돼 있다. 사진 민학수 조선일보 기자 / 2 언덕 위에서 턴베리를 굽어보는 고풍스러운 턴베리 호텔. 제1∙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병원으로 사용됐다. 사진 민학수 조선일보 기자 / 3 2014년 사업가이자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가 턴베리를 사들였다. 이제 정식 이름이 ‘트럼프 턴베리’다. 사진 민학수 조선일보 기자 / 4 등대에는 햄버거와 생선튀김, 맥주 등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 있다. 저 멀리 에일사 크레이그 섬이 보인다. 사진 민학수 조선일보 기자
1 턴베리 클럽하우스 내 프로숍에서 판매 중인 기념품. 그린보수기에 금장식을 했다. 등대 화장실 내부도 황금빛으로 치장돼 있다. 사진 민학수 조선일보 기자
2 언덕 위에서 턴베리를 굽어보는 고풍스러운 턴베리 호텔. 제1∙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병원으로 사용됐다. 사진 민학수 조선일보 기자
3 2014년 사업가이자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가 턴베리를 사들였다. 이제 정식 이름이 ‘트럼프 턴베리’다. 사진 민학수 조선일보 기자
4 등대에는 햄버거와 생선튀김, 맥주 등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이 있다. 저 멀리 에일사 크레이그 섬이 보인다. 사진 민학수 조선일보 기자

턴베리는 제1·2차 세계대전 기간 영국 공군 비행장으로 이용됐다. 코스 건너편 언덕에 자리 잡은 고풍스러운 호텔은 병원으로 사용됐다. 코스에는 여전히 활주로의 흔적이 남아 있다. 12번 홀 그린 옆 언덕에는 실종 군인을 기리는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2번 홀의 이름이 ‘기념비(Monument)’다.

골프사에 영원히 남을 명승부가 턴베리에서 펼쳐졌다. 1977년 디 오픈은 막 물이 오른 톰 왓슨(70·미국)과 이미 전성기를 지나고 있는 잭 니클라우스(79·미국)의 대결로 유명하다. 당시 28세의 왓슨은 메이저 2승을 포함해 통산 7승을 기록한,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37세의 니클라우스는 메이저 14승을 포함해 통산 64승을 거둔 베테랑이었다. 둘은 4라운드 16번 홀까지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그러다 파5 17번 홀에서 왓슨이 버디를 잡아 처음으로 1타 차 선두로 나섰다. 마지막 18번 홀에서 니클라우스는 티샷을 러프로 보냈지만 두 번째 샷을 에지까지 보낸 뒤 약 12m의 버디 퍼트를 욱여넣었다. 하지만 왓슨은 그 전에 이미 어프로치 샷을 홀 60㎝ 거리에 붙여놓았다. 왓슨은 버디를 잡으며 긴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왓슨이 니클라우스를 1타 차로 이겼는데 2위 니클라우스와 3위와의 타수 차이는 10타나 됐다. 사실상 뜨거운 태양 아래 이뤄진 둘만의 대결이었다. 그래서 이날의 대결을 ‘듀얼 인 더 선(Duel in the Sun)’이라 부른다. 18번 홀의 애칭도 2003년 ‘듀얼 인 더 선’으로 바뀌었다.

2009년 이곳에서 열린 디 오픈에서 당시 59세였던 톰 왓슨은 새로운 역사를 쓸 뻔했다. 최종일 1타 차 선두를 달리다 마지막 18번 홀(파4)에서 뼈아픈 보기를 범해 연장전을 허용한 뒤 스튜어트 싱크(미국)에게 패했다. 최고령 우승 기록을 놓치고도 푸근한 미소를 잃지 않던 왓슨은 안타까워하는 팬들에게 “이게 장례식은 아니지 않느냐”며 에일사를 떠났다.

턴베리는 박인비가 2015년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며 커리어 그랜드 슬램의 마지막 퍼즐을 맞춘 곳이기도 하다.

턴베리의 에일사 코스에서 가장 유명한 홀은 파3 9번 홀이다. 티잉 구역에 서면 왼쪽으로 등대가 있고, 해안 절벽을 넘겨 그린을 공략해야 하는 곳이다. 홀의 애칭은 ‘브루스 캐슬(Bruce’s Castle)’이다. 대부분 골퍼들이 샷은 뒷전이고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정신이 없다.

턴베리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흔적을 도처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2014년 턴베리를 인수한 트럼프는 골프장 정식 명칭을 ‘트럼프 턴베리’로 바꿨다. 클럽하우스는 현대적이고, 상업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골드바 형태의 케이스에 든 기념품도 팔았다. 화장실도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꾸며 놨다. 현지 출신 직원은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됐다”며 “온통 트럼프란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게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세상일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니냐”고 했다.

턴베리는 2020년 디 오픈 개최지로 유력했으나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2015년 디 오픈 순회코스에서 제외했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트럼프가 멕시코 이민자와 무슬림에게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하던 때였다.

민학수 조선일보 스포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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